<디아스포라를 체현하는 시인 김시종>
*유민의 중첩/언젠가 나는 이 노래[클레멘타인]와 그의 기구한 관계에 대해 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노래는 신기하게도 마치 김시종 선생님 자신에 관한 노래인 듯해요.” 그때 김시종의 대답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우리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 즉 우리 할아버지를 향해 부른 노래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김시종의 아버지 김찬국 역시 1919년 ‘3・1독입운동’관계로 당시 다니던 전문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만주’를 방랑하던 시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김시종의 아버지는 그때 행방불명된 ‘딸’의 위치에 있었고 그런 입장에서 <클레멘타인의 노래>를 자기 아버지, 즉 김시종의 조부를 향해 불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pp.18-9.
*유민의 기억에 대한 논쟁
[홍윤표]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의 방법이 확립되어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긍지를 지닌 이때, 유민의 기억과 관계된 일체의 부르주아 사상이 우리의 주변에서 일소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 치열한 자기내부투쟁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p.53
[김시종]내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우리 각자가 가진 ‘유민의 기억’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일소한다면서 기고만장할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의 ‘유민적 기억’을 끄집어내는 웅크린 자세가 선결문제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 지점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고 논한 적도 없다. 혹 ‘유민의 기억’을 계속 지니는 것이 노예적이고 낡은 인간상이라면, 그것을 극복한 기름기 흐르는 ‘종이호랑이’가 우리 진영에 많다는 말인가! 내 경우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쉽기까지 하다. 바로 그 점에서 ‘유민적 기억’은 말살되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 캐어내어야 할 초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유민의 기억’을 개척하지 못한 것이지, 그것을 계속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pp.56.
[김시종]내 작품의 지류는 ‘유민의 기억’이다. 이를 내 식으로 말하면 내 작품 발상의 모체는 나의 과거, 그에 얽힌 민족적 비애와 결부되어 있다. 내 손은 젖었다. 물에 젖은 자만이 가진 민간함으로 어떤 미소한 전류(電流)도 내 손은 그냥 지나치기를 거부한다. 가령 그것이 3볼트 정도의 전기작용이라 해도 내 손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여 떤다. 여기에 내 주요한 시의 발상의 장이 있다.p.56.
민전에서 총련으로 이동하면서 김시종은 극좌모험주의로 규탄의 표적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유랑의 기억’이라는 개별적 기억에 빠진 허무주의적, 부르주아사상이 밑바탕에 흐른다고 비난받는다. 그리고 총련이 원하는 문학이란 총련 활동에 대중적 기반을 도울 보조적 수단으로, 힘찬 미래, 힘찬 인간을 그리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 미래와 인간은 전형성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란 작가 개인만으로 함몰되지 않지만 작가라는 접점으로 빗겨가는 일상과 정치를 무시하고서는 쓰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중첩들이 작가로 하여금 글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다. 김시종에서 4・3과 어머니의 기일이 겹쳐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화자는 개별적일 수 밖에 없으며 작가가 이 개별적인 것에 몰두하여 돌파해나갈 때 그것은 보편성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가장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이다. 총련에서 원하던 전형적 인물, 상황으로 이루어진 문학이란 이미 설계되어진 틀에 맞춰 찍어내는 찌라시이다. 그것은 개별적 작가를 필요치 않는다. 이때 작가는 무용지물, 폐기물이 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총련에 의해 김시종은 폐기물이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작가이다.
*새로운 노래에 대한 희구/김시종은 오노 도사부로의 ‘단가(短歌)적 서정의 부정(否定)’이라는 명제를 오늘까지 계승하고 있다. …김시종에게 그러한 시=노래는 이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구현하는 화조풍월(花鳥風月)에 의탁하여 읊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는 시=노래는 문자의 연결 자체로 읽는 이들에게 문자의 배열로 바꾼 시구(詩句)이다. 혹은 그 시구의 모습 그대로 새겨지는 사고의 전개일 수도 있겠다.[예;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게 아니다./네가 서 있는 그 지점이 지평이다-<자서>중에서]pp.31-32.
[김시종]은 1편의 시에서 어느 프레이즈(phrase)가 이치에 맞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머무는 작품. 그 시행(詩行)을 그대로 머금는 것. 그런 것을 나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시가 궁극적으로는 노래가 되는 경우,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p.32.
*
부전 두 장과
붉은 서 세 줄에
깔린
한국 제주국발
항공우편이
마치 집념처럼
동체착륙한
처참한 형상으로
손에 떨어졌다.
이건
한국제
널이다
엎드려 옻을 상식하고
살아있으면서
미이라가 된
어머니의
70여 년에 걸친 고별의 글이다
흔히 종이쪽
지질에 스민
냄새여
잃어버린 고향의
망국의
그늘이여
거북이여 pp.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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