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 국일미디어, 1998.
죽음을 기억하는 시간의 법칙; 망각
죽음의 잔여물들
알베르틴의 죽음 이후, 죽음의 잔여들이 마르셀의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이미 종료된 사건 속에서 마르셀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일까.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마르셀은 여전히 알베르틴과 간수와 죄수 관계로 호기심을 유지하며 알베르틴의 성애적 취향을 밝혀내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고 탐색한다. 그 속에서 알베르틴과의 관계 속 생산되던 감각들인 긴장감, 고통, 질투는 지속된다. 이 감각들을 지속하기 위해서 마르셀은 예메를 조사원으로 보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하며, 앙드레를 취조한다.
10권의 후반부에서 마르셀은 “언젠가는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180)짐작하며, “사고 그 자체는 지치고, 추억은 소멸한다”(181)고 말하며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 역시 알베르틴의 사건으로부터 헐거워지는 듯하다. 어머니와의 베네치아 행, 질베르트와 생루의 혼인(질베르트->포루슈빌->생 루), 쥐피앙의 조카딸과 캉브르메르 아들과의 혼인 등이 주로 마르셀의 일상을 채운다.
10권 후반부의 서술방식은 좀 산만한 듯 하다. 게르망트 공작 부처가 질베르트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와 생각보다 허무한 베네치아 여행, 그리고 두 혼인에 대한 서술과 생 루의 성적 취향의 변화 등이 이야기로 나온다. 중심이 없이 흘러간다는 느낌. 아마 이것이 알베르틴을 잃어버린 마르셀의 상태이리라.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여자들을 놓지만 그 관계 역시 흩어져버리기만 한다. 어떻게 보면 마르셀의 모든 관계가 사교계의 기호만이 난무하는 관계로 변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예전에 차이를 가지고 구분되던 사교계, 사랑, 예술 등등이 별 구분 없이 뒤섞이는 형태를 선택한 것인가.
망각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서 이것들을 묶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망각”이다. 산만한 서술 속에서도 두 혼인이 만들어낸 이름들은 망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들 혼인 후 그들은 새로 얻은 이름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얻는다. 그리고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새로운 이름으로만 알게 된다. 질베르트는 어머니 오데트가 재혼을 하며 포루슈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후에는 생 루와 결혼하여 후작 부인이 된다. 유태인이자 부르주아지였던 아버지와 한때 창부였던 어머니의 흔적은 새로 얻은 이름 덕에 잊혀진다. 또한 캉브르메르 후작 부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올로롱이 처음부터 명문 귀족 출신일 줄 알며, 르그랑댕은 메제글리즈 백작이 된다. 모든 흔적을 지운 이름들. 이 이름들에 대해 마르셀은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다. 이들 혼인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질베르트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흔적들을 지우려는 것이 옳은지 의문한다. 하지만 질베르트가 스완을 잊듯이, 나와 앙드레는 알베르틴을, 어머니는 할머니를 잊어간다.(혹은 어머니는 이기심으로 기억한다.) 망각하기를 거부하면서도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 망각은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이다.
내가 그 힘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망각,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살아남은 과거를 조금씩 파괴해 가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강력한 연장이다.(180)
그렇다면 그들이 잊지 않으려고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머니가 붙잡고 있는 할머니란 무엇인가. 그것이 진실로 할머니인가. 혹은 망각하지 않는 것만이 소멸과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인가. 마르셀은 망각을 거부하면서도 알베르틴을 추억하며 망각하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알베르틴이 그날 밤 오겠노라고 알려 온 옛날 편지를 읽고, 한순간 나는 기다릴 때와 같이 마음이 들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갈 때에 통과했기 때문에 어느 정거장의 이름이나 모습도 잘 기억하고 있는 고장에서, 같은 노선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그 중 한 정거장에 정차해 있을 때, 문득 착각을 일으키는 법이다. 전번과 같이, 오던 쪽으로 다시 출발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착각은 금새 사라지지만 한순간은 그쪽으로 다시 실려 간다. 추억은 이처럼 잔인하다. 그 뿐만 아니라 최초의 출발점인 무관심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사랑에 이르기 위하여 거쳐 온 먼 거리를 거꾸로 통과해야 할지라도, 그 통과하는 노정은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망각도 사랑도 양쪽 모두 규칙적으로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에, 그 길이 똑바르지 않다는 점은 공통점이 되지만, 그래도 꼭 같은 길을 지난다고는 할 수 없다.(182)
망각은 또한 시간의 관념을 크게 바꾸어 버린다.…일을 하고 싶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 생활을 일변시키고 싶다, 차라리 삶을 시작하고 싶다…나의 기억 한가운데서 이와 같이 단편적으로 불규칙하게 띄엄띄엄 나타나는 망각이-마치 큰 바다 위에 나타난 짙은 안개가 사물의 원근을 혼란시키듯이-시간 속의 거리 감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산산조각을 내어, 저기는 작고 여기는 크게 해 버릴 뿐만 아니라, 나 자신마저도 실제 이상으로 사물과 가깝게 또는 멀리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직 내딛지 않은 새로운 공간 속에는 지나간 시간 속처럼, 알베르틴에 대한 나의 사랑도,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그 흔적이 전혀 없을 테니까,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를 받쳐주는 동일 불변한 것이 전혀 없는 그 무엇처럼 생각되었다.(227-8)
망각과 사랑은 반대말이 아니라 극과 극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같은 정거장을 점유하며 지나간다. 다만 둘의 방향만이 다를 뿐이다. 이는 과거의 사랑을 현재 속에 다른 방향으로 “생성”(184)해나가는 것이다. 과거에 마르셀이 “소나타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한 악절의 형식이나 시도나 복창이나 생성”에 마음이 끌렸다면, 망각은 “이 소악절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또 다른 방향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은 대상을 고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생성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9권까지의 마르셀이 알베르틴을 자신의 방에 고정하려 하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아름다움만을 골라 알베르틴을 기억했다면, 10권에서야, 알베르틴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는 알베르틴을 감각적으로 생성시킨다. 또한 알베르틴과 할머니에 대한 망각으로 생긴 거대한 구멍은, 실제로는 알베르틴과 할머니의 자리겠지만, 그것을 구멍이라 착각하게 하며 그 구멍을 채워가고 싶은 새로운 ‘자아’를 눈뜨게 한다. 이때서야 기억은 영원성을 향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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