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국일미디어, 1998.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기억하려 하는가.
성인 화자인 나는 흘러간 옛 우리 집의 생활, 콩브레에 있는 대고모 댁, 발베크, 파리, 동시에르, 베네치아, 그 밖의 고장에서 생활을 회상하며 밤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15) 그리고 화자는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아리송할 때 추억이 구원한다고 말한다.(10) 그에게 사물 뿐 아니라 나라는 부동성과 그 부동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 사고의 부동성(11) 이며,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다.(17) 오히려 사물이나 나는 불확실한 것들의 수면 위에 있다. 달리는 말을 구경하면서 영사기가 나타내보이는 연속적인 자태를 실제로 분리해서 판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12) 화자에게 기억이란, 기억을 한다는 것이란 연속적이고 확실한 것 아래서 일렁이는 불확실한 것들을 상기해내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4차원의 현재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망각으로 탈환되는 영토를 망각의 바닷 속에 솟아올라 다시 지어지기(97)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의지적 기억과 대비하여 비의지적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적 기억이란 “회상이 주는 과거에 대한 정보는 참된 과거를 무엇 하나 간직하지 않는다. 그러한 모든 것은 실제로 죽”은 것이다.(65) 그렇다면 비의지적 기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며 창조해내는 것이다.
엄마가 애정 깊은 얼굴을 나의 침대 쪽으로 기울여, 그 얼굴을 화합의 성체배령을 위한 면병처럼 나에게 내밀어, 나의 입술이 이 면병에 임하시는 엄마의 현존과 안면의 힘을 퍼내려한다.(21)
나의 몇 줄의 글을 읽는 동안 나에게 우의를 기울이는 엄마는 마치 무르익은 과일이 터진 껍질 사이로 단물을 내듯, 자식을 생각하는 진정을, 이 도취된 나의 마음 속에까지 분출시켜 던져 주려하고 있다. 지금 나는 이미 엄마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계가 무너지고 다사로운 한 줄기 줄이 우리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46)
엄마의 저녁 작별인사에 관한 기억 속에 우리는 그러한 단초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엄마와의 일화는 단지 신경증자의 현상이 아니다. 엄마라는 대상과 더불어 있는 성스러움, 그 성스러움의 유출을 붙잡아보려는 상기라는 것을 위의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에서 나타나는 비자발적 기억의 두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보리수꽃차와 마들렌 방식의 리듬-콩브레의 시절로 깊이로 진입하여 현재 속에서 기억이 펼쳐지는 방식으로 완만한 리듬감을 형성2)스완과 내가 엮이는 방식의 리듬-콩브레와 그 이후의 기억을 뒤섞으며 기억을 새롭게 직조하는 방식으로 격정적이고 빠른 진동.
또한 비자발적 기억은 감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기억을 담뿍 담은 사물도 그러하지만 인간 역시 감각에 의해 지각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마들렌의 일화이다. 어머니가 준 차와 마들렌에서 그 물질이 몸 안에 퍼지면서 감미로운 쾌감을 자아낸다. 그것은 물질을 초월하여 나에게 힘찬 기쁨을 전해온다. 미각과 결부되어 미각의 뒤를 이어 자아의 거죽으로 올라오려는 심상, 시각의 추억. 그것은 기억 바깥에 버려진 기억으로, 뒤숭숭한 색채의 포착할 수 없는 회오리로 빙빙 돌려 무색의 반영으로 나에게 온다. 그 형태를 나는 식별할 수 없어서 다만 미각이 그것을 번역해주기(68)를 청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감각만이 그 무형을 오랫동안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다.(69) 그리고 그것은 우연으로 다가오지만 또한 기다리는 자에게 순간으로 온다.
애인이 미지의 환락을 맛보려 하고 있는, 그 가까이 갈 수 없는 동시에 지옥 속 같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틈이 나 그곳으로 우리는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 가까이 갈 수 없는 시간을 일각일각 구성하고 있던 순간의 하나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순간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순간, 애인이 거기에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만큼 더 중대한 한순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마음 속에 그리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갖는다. 거기에 참여한다. 아니, 그 한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거의 창조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래층 현관에 있는 것을 애인에게 알리려하는 그 순간인 것이다.(47)
*스완과 나와의 차이
우리는 아직 스완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나와 연계되어 있는지 아직 분명하게 다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먼저 스완과 나의 예술에 대한 정신적 교류가 오고갔음을 스완이 내게 준 그림과 둘이 나눈 베르고트에 대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먼저 선명하게 둘의 차이가 제시된다.
스완의 고뇌란, 자기가 가 있지 않은, 자기가 따라갈 수 없는 환락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느끼는 고뇌인데, 이를 그에게 알게 만든 것은 연정이고, 도 이러한 고뇌는 연정과 일종의 숙명으로 연결되고 연정에 의해서 고뇌가 독점되어 특수화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처럼, 연정이 아직 삶 속에 나타나기에 앞서 고뇌가 마음 속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 고뇌는 연정을 기다리는 동안 막연히, 한가롭게, 정해진 목적 없이, 어느 날은 어느 감정에, 다른 날은 다른 감정에, 어떤 때 자식으로서의 애정에, 어떤 대는 벗에 대한 우정을 따라 떠돈다.(46)
스완과 나의 차이 중에 특정적인 것은 스완의 고뇌는 연정으로 독점되고 특수화되는 반면, 나의 고뇌는 무목적으로, 혹은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고 그것에 연정이 결정적으로 걸려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연정은 나에게 고뇌의 무목적성을 펼쳐가는 연결지점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여행에의 꿈도, 연애의 꿈도, 바로 내 생명의 온갖 힘의 굽힐 줄 모르는 한결같은 용솟음의 여러 순간에 지나지 않았(125)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고뇌는 그의 생명의 힘의 다른 이름이다.
'서평_야생의 시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시종]디아스포라를 체현하는 시인 (0) | 2024.06.05 |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죽음을 기억하는 시간의 법칙; 망각 (1) | 2024.06.05 |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블로크, 특이성 (0) | 2024.06.05 |
최인훈에 대한 네 개의 산문 (0) | 2024.06.05 |
[전쟁의 슬픔]거대서사가 새긴 상흔의 신체 (2) | 2024.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