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게르망트쪽1』, 국일미디어.
1.빌파리지 부인의 살롱
집안의 고유하고 가치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별하던 콩브레의 세계를 벗어나 마르셀은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까지 도착했다. 빌파리지 부인은 명문으로 태어났고 결혼도 명문인 가문에 들어갔음에도 사교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부인들 중 하나이다. 이 살롱에 모이는 사람은 조카딸, 올케뻘 되는 두세 명의 공작 부인, 왕족 한두 분, 가정의 옛 교제 관계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삼류의 사람들인 부르주아 신분인 시골 귀족이랑 영락한 귀족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살롱을 쇠퇴의 상태이며 이류라 한다. (236)
하지만 그녀의 옛 교제관계나 가문 때문에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 모이는 사람들의 종류는 베르뒤랭의 살롱과는 또 다르다.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인 좀 이상하긴 하지만 책은 베르뒤랭살롱, 오데트의 살롱, 그리고 우리를 혹은 마르셀을 빌파리지 부인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모여 있는 살롱으로 데리고 간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열정을 불태우는 마르셀은 여전히 그 살롱에 있지만 5권 후반부의 시선은 전반부와 달리 객관적이다. 그리고 빌파리지 부인을 포함하여 살롱에 모인 자들의 진면목은 블로크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드러난다.
빌파리지 부인에 대한 마르셀의 시선-이는 이 글을 쓰는 자이자, 그녀의 회상록을 읽은 자로서-은 그녀를 이류 작가(237)로 줄곧 평가한다. 그녀는 추문과 이 지성 때문에 사교계에서 몰락하였다.(237) 빌파리지 부인의 예술에 대한 안목은 아이러니한 태도를 보인다. 특히 블로크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이를 보여준다. 그녀는 극작가로서 블로크를 초대하지만 그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감식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극에 그녀가 아는 사람들을 출연시키기 위함이다. 특히 블로크가 살롱에서 드레퓌스 문제로 논쟁을 하려는, 그리고 유대인인 그를 쫓아내려고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예술에 대한 태도가 마르셀이나 엘스티르의 그것-사물의 본질과 참을 드러내고자 하는-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재능이라는 것이 아무리 예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사교계에서의 몰락으로 부추겨진 것뿐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부류의 여자들, 특히 알릭스와의 대화 속에서 그녀들에게 예술이란 것이 참된 예술을 발견하려는, 혹은 참된 미를 발견하려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들에게 예술이란 살롱의 유일한 가치를 높여주는 것으로 밖에 기능하지 않아 예술에 대한 평가보다 어떤 예술가를 자신의 살롱에 먼저 초대했는가를 경쟁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술에 대한 태도는 게르망트 공작 부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살롱에 명사들을 초대하지만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직은 그녀의 수줍음 탓, 스스러움 탓, 서투름 탓이며 심오한 것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우리는 빌파리지 부인의 태도에 연이은 게르망트 공작 부인 살롱에 대한 간략 속에서 이미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빌파리지 부인이 그리는 수채화를 둘러싸고 처음으로 그들은 예술 작품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듯 하다가도 그것이 사과나무다, 아니다라는 정도의 의견을 나눈다. 그들에게 예술이란 하나의 지시관계만에 지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빌파리지 부인이 초상화를 모으는 수집벽에서도,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그림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자들을 영접하러 오는 것일 터이다. 퇴락한 살롱일지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여전히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노르푸아는 팡탱 라투르라는 프랑스 화가의 꽃 그림보다 빌파리지의 꽃 그림이 빛깔이 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사교계의 인사들의 예술에 대한 판단력이 얼마나 참된 취미 없음 위에 서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샤를뤼스의 말은 그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사교계에 대한 참을 마르셀에게 말한다. “사교계에 나간다면 자네는 자네 처지를 불리하게 하고, 자네 지능과 성격을 망칠 뿐이오.”(383)
2.블로크, 드레퓌스 사건으로 계급의 정치적 분배
드레퓌스 사건이 유태인들을 사회 계급의 최하층에 떨어뜨리려는 참에 마르셀은 기이하게도 블로크에게서 종족의 놀라운 힘을 본다. 이 사건은 마르셀에게는 지적 유희로 가득찬, 관념적 말들을 남발하는 개인으로 블로크가 아닌 깊이를 띤 형상으로서 블로크를 바라보게 한다. “그제서야 그 형상이 깊이를 띠고, 3차원으로 확장되고, 움직임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지껏 미술관에서만 엿보아 온 영혼, 뜻없는 동시에 초월적인 삶에서 빠져 나온, 옛 그리스인의, 옛이스라엘의 영혼이다.”(245-6)
마르셀은 왜 블로크를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나. 이는 블로크의 변화에 기인한다기 보다 블로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연관된다. 사람들은 이제 ‘블로크’라는 기이한 극작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유태인’이라는 종족만을 본다. 그리고 이 유태인의 종족을 거점으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정치적 분배가 이루어진다. 반드레퓌스파에는 노르푸아 같은 ‘국가주의자’, 개인으로서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반드레퓌스파인 게르망트 대공, 자신의 남편이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살롱의 입지를 위해 반드레퓌스파를 선언한 오데뜨, 결코 선언도 하지 않지만 블로크를 내쫒는 빌파리지 부인.
이러한 반드레퓌스파, 혹은 드레퓌스파들이 유태인이라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블로크를 따라다니는 유태인이라는 낙인은 마르셀에게 오히려 그의 고유성, 깊이, 힘을 보게 한다.
더불어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어떤 사실관계나 유태인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 보다는 한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계급의 재편을 보게 된다. 이러한 재편은 기존 신분제보다 평등할지도 모른다. 오데뜨는 이 기회를 통해 귀족 부인들까지도 자신의 살롱에 들이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이를 우리는 마르셀의 말을 빌러 정신적 계급이라 할 수도 있고, 정치적인 계급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유태인이라는 최하층을 다시 만들어 계급을 재설정하는 사람들의 모습, 혹은 최하층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또 다른 계급투쟁을 빌파리지 부인의 작은 살롱에서 엿보게 된다.
한 사건 속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이해관계 속에 뛰어들 것인가. 사건 속에서 솟아나는 다른 힘을 볼 것인가. 여기에 샤를뤼스의 독특한 지점이 나타난다. 샤를뤼스는 모두에게 드레퓌스 반대파라고 생각하게 행동하지만 그는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고소된데 항의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샤를뤼스는 자신의 입장을 선언하지 않는가 혹은 은연중에라도 드러내지 않는가가 궁금해진다. 마르셀은 블로크나, 블로크 아버지에 대한 샤를뤼스의 조롱하는 태도로 그가 반드레퓌스파는 아닌지 생각한다. 하지만 샤를뤼스의 이러한 태도는 이중적이기보다 그가 지향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종족에 대한 지지나 반대보다는 드레퓌스 사건의 실체, 그 자체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우리의 삶에 형태를 주려고 애쓰나, 우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이 아니라, 현재 있는 인간의 모습을 데생처럼 마지못해 모방하면서 그렇게 한다.”(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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