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_야생의 시학

[김시종]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을 넘어서, 생존자

김시종, 김정례옮김, <광주시편>, 푸른역사, 2014.

 

시를 쓴다는 것

 

<광주시편>에서 김시종은 광주, 오월이라는 말을 2부에 들어서 <>(pp.36-38)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언급한다. <니이가타>가 제주, 43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광주시편>에서 우리는 80518사건에 대해 이 시집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시종은 518에 대해 직접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일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것이다.

시는 영산강 주변 바람조차 맴도는 어느 부근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다.(<바람>,p.15.) 하지만 그 바람은 잔잔한 바람이 아니고 말하지 못하는 누군가들을, 사건들을, 대신하는 몸짓, 몸부림이다. 바람이 뒤에서 불고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뒤를 바라본다. 거기에 바람이 전한 공허한 틈새가 있다. 비명을 지르는 이는 누구인가, 바람인가, 바람이면서 바람이 아니기도 하다.

1부에서 죽음과 관련된 신음, 몸부림은 2부에서 를 만난다. 나는 1부의 사건 속에 없었다고 말한다.(<바래지는 시간 속>p.31)“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그런데도 왜 나는 이렇게 내가 없을 때 터진 그 자리, 사건, 누군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이는 앞서 우리가 읽었던 김시종의 말과 관련이 있다.

 

내 작품의 지류는 유민의 기억이다. 이를 내 식으로 말하면 내 작품 발상의 모체는 나의 과거, 그에 얽힌 민족적 비애와 결부되어 있다. 내 손은 젖었다. 물에 젖은 자만이 가진 민간함으로 어떤 미소한 전류(電流)도 내 손은 그냥 지나치기를 거부한다. 가령 그것이 3볼트 정도의 전기작용이라 해도 내 손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여 떤다. 여기에 내 주요한 시의 발상의 장이 있다.(<디아스포라를 사는 시인 김시종>.p.56.)

 

김시종은 518에서 끝없이 현행화하는 416의 전류가 작동됨을 느낀다. 그에게 시는 과거의 일을, 어떤 사건을 죽은 것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현행화를 읽는 이에게, 사는 이에게 사건으로, 현재의 전류로 느끼게 하는 일, 자신이 전류를 감지하여 떨 듯이 그렇게 현행화하는 일이 바로 시가 하는 일이다. “세상에 죽음은 많고 삶 또한 많다. /단지 목숨을 부지해서 삶이라면/강요된 죽음 또한 살려지진 삶이다./국군에게 지켜진 적이 없는/버림받은 자유의 시체인 것이다.” (<명복을 빌지 말라>,p.50)

김시종은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진경, 혹은 들뢰즈에 의하면 이것은 기억이 아니라 사태의 현행화일 것이다.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아아 기억이 있는 한/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감을 눈이 없는 사자死者의 죽음이다./땅에 묻지 마라./사람들아,/명복을 빌지 말라.(<명복을 빌지 말라>,pp.51-2) 혹은 전류를 흐르게 하는 것, 곧 사건화인 것이다.

호소미 가즈유키는 <디아스포라>에서 하이네와 파울 첼란, 그리고 카프카 등의 유대인을 김시종과 잇고 있지만 김시종은 이에 더해 광주를 잇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에 더해 14416을 잇고 있을른지도 모른다.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도 유민인 누군가를 묻을 수 없다.

 

생존자의 범위

 

한때 나는 죽은 자들을 죽인 자들, 3부에 나오는 <그리하여 지금>, <미친 우의寓意>공수부대 병사들이나 <돌고 돌아서>호시야마’(정확하게 이것이 박정희인지, 전두화이지, 혹은 그 둘 다 인지 알지 못하겠다)같은 이들. 이들 가해자를 이해해보려는 논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도 국가권력의 희생자라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지금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시간 세미나 발제 중 수인의 생존자의 증언이라는 말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 역시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에 갇혀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은사건 속에 휘말렸던 이들을 모두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있어도 상관없을 만큼/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바래지는 시간 속>)고 말한 김시종의 5행에서 최근까지도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 늘 없던 나는 피해자가 아니며, 평안하게 지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나도 가해자를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그것의 시공간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머나먼 과거가, 그리고 현재들이 주는 슬픔에 늘 몸을 떨어야하면서도 나는 나를 가해자라 인식했다. 혹은 아픔을 같이 하는 자로 나를 정의하기엔 그것이 연민의 말이 될까봐 어떤 행동도, 언어도 사용할 수가 없이 침묵했다. 특히 광우병 촛불 집회 이후 이러한 나의 행동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러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말과 행동이 바로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이 갖는 한계라는 것을 지난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사태라는 현장 속에서 많이들 비껴나있다. 518의 광주라고 하면 모두들 피해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도 다들 내가 그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복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한 사태의 현장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비껴나있다. 그것이 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니, 죽은 자가 아니니 모두 가해자인가? 이 구도를 적극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사고가 바로 생존자의 증언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생존자란 무엇인가? 김시종 역시 광주로부터, 한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에 살고 있지만 광주에 대해 시를 쓴다. 그는 <광주시편>의 도입부에 나는 잊지 않겠다. 세상이 잊는다 해도 나는, 나로부터는 결코 잊지 않게 하겠다고 말한다. “세월 속에서 옹이지는 것”, “가버리고 만 해에 더욱 눈을 뜨오늘의 어제를 눈여겨보”(날들이여, 박정한 저 내장안內障眼의 어둠이여)자고 한다. 어제가 포개져 오늘이고, 오늘이 포개져 내일인데 우리에게 오늘과 내일 속 어제들의 옹이가 끊임없이 발에 걸린다. 발에 걸리는 옹이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자, 그것이 생존자이다. 그리고 그 옹이를 펼쳐낼 때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이 비로소 운용된다. 멈춘 우주 속에서 자위하며 살지 말 것, 아니, 그렇게 살더라도 시간의 옹이를 몸으로 기억하는 것, 그래서 다른 옹이를 마주할 때 옹이들의 시간을 다시 펼쳐내는 것, 그것이 시간의 옹이가 갖는 힘이자, 시간의 옹이를 감각하는 자인 시인이 하는 행위이며, 생존자는 다시금 시간의 불을 지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