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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야생의 시학

[전쟁의 슬픔]거대서사가 새긴 상흔의 신체

바오 닌, 하재홍 옮김, <전쟁의 슬픔>, 아시아, 2017.

 

 조너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근에 관한 부분이었다. 베트남 전쟁 후 미국 병사들에게 국가는 집단적 신경정신심리 상담을 진행한다. 그 과정을 통하여 미국 병사들에게 일정한 훈육이 수행된다. 미국 병사들은 베트남 전쟁 중 일어난 사건을 끊임없이 되살려야하고, 그 사건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해야 하며, 그것을 반성해야 한다.

 이 고해성사 같은 치료 속에서 가장 신경이 거슬렸던 부분은 전쟁의 사건을 병사 개인의 문제로, ‘로 수렴하게끔 유도하던 지점이었다. 물론 전쟁의 원인이, 갖은 자, 배운 자에게 있지 않은가하는 병사의 말에 동의하였고,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전쟁의 슬픔>을 읽으면서도 이 부분이 자꾸만 겹쳐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이 생각을 명료하게 할 필요가 있다 싶어졌다.

 어떤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는데, 이 혼란스러움을 잡기 위해 생각난 개념어들은 개별자와 집합적 주체라는 말들이었다. 분명 전쟁을 수행하고, 그 수행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새기는 이는 개별자이다.

 전쟁을 겪은 개별자의 삶을, 내면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전쟁의 슬픔> 같은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소설 속 다음과 같은 평범한 각주 같은 것들조차 낯설게 보이게 한다.

 

 1960년의 구정 대공세를 말한다. 1968년 구정 연휴에 북베트남 정규균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주요 도시의 군사 기지와 공간을 공격한다. 군사적으로는 실패한 작전이지만 미 대사관을 3시간 동안 점령하는 등 미군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거둔다. 전세계적으로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존슨 대통령은 재선 포기 선언과 함께 평화 협상을 추진한다. (p.27)

 

 이 각주의 문장이 낯설어 보이는 것은 끼엔이라는, 그를 둘러싼 전쟁을 겪은 자들, 전쟁 중 죽어간 자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도박이나 대마로 잠시 현실을 미뤄두는 병사들, 탈영을 하려다 죽은 깐의 말처럼 전쟁이 빨리 끝나든 늦게 끝나든 이기든 지든 아무 의미도 없(p.36)”는 전쟁. 이런 전쟁 속에서의 개별자들의 발화를 들어버린 우리는 득과실을 따지는 경제적, 정치적인 거대한 시선으로 쉽게 이동하기 쉽지 않아진다. 가장 내밀한 시선에서 거대한 시선으로 옮기는데 곤란함이 생기고, 초점을 맞춰지질 않다. 이 두 개의 시선에서 일어나는 현기증.

그런데 내 혼란스러움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기에 더해진 한 가지가 더 있다. 개별자가 집단적 주체라는 것이다. 개별자와 집단적 추체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내밀한 시선과 거대한 시선이 대립적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누군가 나에게 전쟁에 득실을 따지지 않으면 민중이 수행한 전쟁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것이야말로 회의주의적이지 않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말에도 역시나 동의한다-<전쟁의 슬픔> 속에서 끼엔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을 소설이라할지, 에세이라 할지, 메모의 연결이라 해야할지 좀 애매했다. 끼엔이라는 사람이 단일 주체이긴 한 건지, 흩어져있는 전쟁담과 전쟁전후의 일상사들이 어떤 연결성을 갖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전쟁담은 단지 우연이고, 문득, 문득 끼엔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솟아올라와 끼엔의 일상을 뒤덮고 있었다. 프엉과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를 보증해줄만한 고유한 것이 없었다.-그렇기에 끼엔에게 프엉은, 혹은 사랑은 중요하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개별자의 고유성을 증빙하는 것이다. 프엉 없이 끼엔이라는 개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하지만 7장의 한 장면에서 나는 이 소설의 구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오 닌이 경험하고, 생각한 전쟁을 이해하게 되었다.

 

 끼엔은 자전거에 올라타서 거울을 조정하고 경적을 울려 보고 가볍게 페달을 밟아 보았다. 프엉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항도 하지 않고 끼엔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다. 자전거에 태우는 지금도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분고분 뒷자리에 빠르게 올라탔다. 아주 가벼웠다. 예전에 둘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닐 때와 똑같았다.

 길 양쪽으로 불타는 집, 무너진 집, 쓰러진 나무, 휘어진 가로등이 널리 있었다. 끼엔은 갈지자로 운전하며 잔해들을 피해서 갔다.(p.294)

 

 군대로 가는 끼엔과 프엉이 우연하게 만나던 그 날, 끼엔과 프엉이 처음 경험한 전쟁. 그것은 일상성의 공중분해였다. 전쟁 전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 모두가 이제 사라져버린, 그 일상성을 그리워하고, 일상성을 회복하려는 모든 움직임이 위험해지는 가치전도가 일어나는 일, 그리하여 폭력 앞에서 그것이 폭력이다라고 외칠 수 없는-프엉이 열차에서 선원복장을 한 사내에게 강간을 당할 때 프엉과 끼엔은 그것이 분명 폭력이고, 프엉은 상처를 받은 것이지만 그들은 쉽게 말하지 못하고 순간 벙어리가 되어버린다-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계획된 것일테지만 그 전쟁 속에서 휘말린 사람들 우연하게도-우연하게도라는 말은 그렇기에 엄청나게 폭력적이다-일상을 날려버린다. 프엉과 끼엔이 자전거를 타는 일은 그대로지만 그들이 달리는 거리는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린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프엉과 끼엔 역시 일그러져있다. 그들은 서로를, 거리를 똑바로 볼 수 없다. 똑바로 보면 일어나는 역겨움과 수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일상성의 모든 가치가 무화되어 버렸다. 이제 이렇게 무너진 거리와 불구가 된 사람들을 무감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재난이다. 모든 의미의 폭력적 가치전도.

 그런데 전쟁이 끝났다고 이렇게 무너진 것들이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사물들과 사람들은 금새 자리를 되찾고, 쉽게 웃고, 재잘거리는 것 같지만 그들 안에 부서진 것들은 그대로이다. 전후 끼엔의 이웃들의 삶이 그것을 보여준다.

끼엔은 프엉에게 지금부터 하노이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면 좀 더 고생을 해야 할 거야”(p.298)라고 말하지만 프엉은 알고 있다.-그렇기에 그녀는 피부를 벗겨 낸다고 달라질 건 없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나는 어떤 체념으로 들리지 않았다. 상처나 아픔의 수용이랄까. 이런 담담한 태도를 나는 쉽게 말할 수가 없다.-과연 돌아갈 수 있는가. 모두가 겪은 전쟁을 없던 일처럼 깨끗하게 지우는 것이 가능한다. 상처가, 아픔이, 수치와 폭력 같은 것들, 살아야겠다는 맹목과 죽이겠다 달려드는 폭력으로부터 앞질러 달려갈 수 있을까.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어느날 갑자기, 신비한 기억의 연상 작용에 의해, 어느 무언극 배우가 자신의 온몸을 고통스럽게 뒤틀며 은밀하면서도 처절하게, 절망에 빠진 삶을 절규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불현 듯 그 옛날 전쟁에 의해 깊은 산속에 감금되었던 그의 정찰대원들과 세 여자의 비참하면서도 무모한 사랑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맞은 순간은 아니었지만, 그 기억은 마치 탐조등을 비추듯 밝고 또렷하게 살아났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반가움과 고통으로 가슴이 떨려 왔다.(p.52)

 

 나는 끼엔의 글쓰기가, 바오 닌의 글쓰기가 우리가 겪은 폭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내밀한 개별자의 목소리야만이 거대서사가 남긴 신체적 언어를 농밀하게 발설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이테 안켠은 표현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나무 안에, 나무로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렇기에 기억은 늘 신체적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 기억 혹은 상처,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개별자의 신체에 살아 숨쉬고 있다.

 끼엔의 글을 읽은 소설 속 는 베트남전에 함께 했던 병사를 우연히 마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트남-미국 전쟁에서 나는 그와 같았고, 평범한 병사들과 같았다. 같은 운명으로 수많은 우여곡절, 승리와 패배, 행복과 고통, 잃은 것과 남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들 개개인은 전쟁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되었다. 개개인이 마음속에서 개별적인 전쟁을 시작한 날부터 공통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싸움을 따로 하게 되었다.(pp.323-4)”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싸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이지만 때론 끼엔과 겹쳐지는 공통의 싸움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베트남 전쟁을 읽어가며, 집단의 상처를 마주하며, 다시금 생각한다. 주체는 개별자이면서 집단적 주체이다. 이 둘은 겹쳐있다. 개인들은 그것이 우연이고, 운명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할 어떤 거대한 사건들이 빗겨가면서 개별자에게 무늬가 생기고, 그 무늬들은 그렇기에 공동성을 갖는다. 서로를 빗겨나간 사건들은 다를 수 있지만 개별자들에게 생긴 무늬는 유사하다. 그 무늬를 고통이라할 수도, 슬픔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그 무늬는 우리를 괄호 속으로 불러 세우고, 우리를 함께이게도 한다.

 슬픔이란 신체에 새겨지는 집단의 기억이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이웃하여 살아간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산자의 고통으로만 표현되기 때문이다. 산자의 신체에 잠재되어 있다가 우연한 순간 터져나오는 죽은 자의 목소리. 우리는 그것을 산자의 슬픔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진행형으로 손잡고 있는 공통의 슬픔이다. 그렇기에 산자의 신체적 고통은 집합적 주체 공통의 현재적 고통이다.

 그렇기에 끼엔의 목소리는 끼엔과 프엉이라는 고유한 개별자의 목소리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 병사의 목소리이고, 도박과 대마초로 전쟁을 잊어보려던 자의 목소리이고,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탈영병의 목소리이고, 적군의 총에 죽고, 강간당해 죽은 호아와 민간인들의 목소리이고, 살아남아 알콜중독자가 된 참전군인의 목소리이다. 끼엔은 기억의 전쟁을 다시 수행하고, 야만의 전쟁에 매몰되지 않도록 우리를 불러 세운다. 우리가 전쟁의 슬픔, 폭력의 슬픔, 그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