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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차가운 사탕들 종유석  동굴 안에 주저앉아물처럼 번져가고 있다 돌이 자라난다 마음이 추락하는 동안 공기를 닦고 있는 검은 손 아무리 문질러도이곳은 밝아지지 않는다한밤밤의 한가운데 떠나간 사람은 떠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 흰 돌 아무리 닦아도너의 눈 속이 보이질 않아나의 일생을 그저 닦아낸다는 것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돌처럼 자라고 있다   폭설  사냥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국경에 이릅니다. 내가 나무에 묶어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늙은 개들.   북쪽에 있는 나무들이 햇빛을 받고 안쪽을 뾰족하게 갈아대는 시간입니다. 송곳니처럼 태양이 부족하고 심장을 잘 찢어야만 합니다.   어느 나라의 사람도 아닙니다. 살냄새를 맡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그것은 떠나는 것도 아니고 걸어 다..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다수 안에서 소수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소수자는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18) 엄마의 말과 생각은 얇고 흰 원단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21) 엄마는 여기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
정끝별, [시론], 문학동네 서문  알레프를 발견하는 자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데 이때 알레프는 '시인에게서 결코 빼앗아갈 수 없'고 '양도될 수도 없'는 시인만의 시선이다. '손바닥만한 우주'로 존재하는 이 알레프는 딜레마와 모순을 그대로 품고 있는 심연이기에 시로만 쓰일 수 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나는 어떤 지점에서나 어떤 각도에서도 알레프를 보았다. 그리고 알레프 안에서 나는 지구를 보았고 지구 안에서 알레프를......"([알레프])(5) 보르헤스는 다른 작품에서 알레프의 현현과도 같은 '한 편의 시'에 대한 우화를 전한다. 황제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춘 가장 완벽한 자신의 궁전을 시인에게 보여준다. 시인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궁전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망나니가 사는 섬에 이..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1.내가 우크바르를 발견한 것은 어떤 거울 하나와 백과사전을 접합시킨 덕분이었다.(17) 우리들은 일인칭 화자를 바탕으로 한 소설작법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이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에게만 경이로울 수도 있고, 하잘것없기도 한 현실을 간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모순 속에 개입한다. (18) 복도의 저쪽 끝에서는 거울이 우리를 염탐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들이란게 괴물스러운 어떤 무엇을 소지하고 있는 사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비오이 까사레스는 우크바르의 한 이교도 창시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18) (20) 나머지는 매우 사실 지향적이었고, 그 사전의 일반적 어조를 그대로 ..
Jorhe Luis Borges, [픽션들], 1부 서문 1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서문  일곱번째([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는 탐정소설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한 범죄의 결행과 그것의 모든 예비 사건들에 대해 접하게 된다. ... 나머지는 환상소설들이다. ... 그렇다고 내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궤적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도표이다. (16)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칼라일이 자신의 저서[다시 재단한 복장]에서 그러했고, 버틀러 또한 [좋은 피난처]에서 그렇게 했다. 이런 작품들은 책이 되기에..